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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은 <청소년을 위한 서양 철학사>를 읽고 개인적인 정리를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보다 정확한 자료 및 원본을 참고 하고 싶은 분들께서는 아래 참고자료를 참고해주세요. ※
건강한 추남, 세계 4대 성인 소크라테스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인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조각가인 아버지와 산파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얼굴은 크고 둥근 데다 이마는 벗겨지고 눈은 툭 불거졌으며, 코는 뭉툭하고 입술은 두툼한 데다 키는 땅딸막했다. 게다가 배가 불룩하여 걸을 때에는 오리처럼 뒤뚱거렸다. 누가 봐도 추남이라고 부를 만했지만, 신체만은 건강한 편이어서 추위나 더위에도 대단한 인내력을 발휘했고, 밤새워 술을 마시고도 끄떡없었다고 한다. 그가 전쟁에 참가했을 때, 혹독한 겨울날씨에도 그는 맨발로 얼음 위를 걸어갔다. 한여름철에는 이른 아침부터 꼬박 밤을 새우기까지 연병장 한가운데에 서서 깊은 사색을 했고, 해가 떠오르자 태양을 향해 기도를 드린 후에 비로소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그는 부친의 직업을 이어받는 일이나 가족을 부양하는 일에 무관심했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했다. 가난했기 때문에 누추한 옷차림으로 아테네 거리에서 아무에게나 말을 걸었다. 그의 뒤에는 항상 많은 제자들이 따랐으며, 그 가운데는 상류사회 출신도 많이 끼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무보수로 제자들을 가르쳤고 대개 저녁 한 끼로 만족했는데, 소피스트들이 수업을 제공하는 대가로 적지 않은 보수를 받아온 것과는 대조적이다. 소크라테스에 못지않게 유명한 인물이 그의 아내 크산티페다. 그녀는 남편이 철학자라는 직업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으며, 집에서는 마치 지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남편을 못살게 굴었다.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서둘러 집을 나와 거리에서 그의 제자들과 철학적 담론에 빠져들었고, 소크라테스는 비로소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어떤 제자가 “선생님,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까, 안 하는 것이 좋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결혼하게, 온순한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사나운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여하튼 가장의 의무를 소홀히 한 소크라테스를 볼 때, 악처의 대명사인 크산티페에게 오히려 동정의 눈길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는 산모가 낳는다, 산파술
소크라테스의 교육 방법은 질문과 응답을 통한 대화로 진행되었는데, 처음에는 단순한 문제부터 시작해서 점점 심오한 문제로 파고들어 갔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경우다. ”덕이란 무엇인가?” ”예, 덕이란 좋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것에는 건강도 있고, 명예도 있고, 권력도 있을 텐데, 이런 것들이 과연 덕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지도.” ”그럼 덕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감으로써 결국 상대방이 자기의 무지를 인정하고 더 깊은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방법인데, 이를 두고 우리는 ‘소크라테스적 반어법’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러한 식의 문답법을 산파술(産婆術)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그의 어머니의 직업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산파는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지, 출산이 더디다고 해서 산모 대신에 아이를 낳아줄 수는 없다. 아무리 고통이 크더라도 아이는 산모 자신의 힘으로 낳아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진리라고 하는 옥동자(玉童子)는 배우는 사람 스스로에 의해서 산출되는 것이지, 스승이 대신해서 낳아줄 수는 없다.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깨닫도록 도와주면 되고, 또 그래야만 한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으나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렇듯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를 통해 진리를 추구해 가는 광경이야말로 교육의 아름다운 이상이다.
무지함을 깨닫는 사람이 현명하다
신전의 양쪽 기둥 밑의 비명(碑銘)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를 평소 외치고 다녔을 만큼 그는 스스로 무지하다고 생각했던 데 비해, 이름난 현자들은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른바 현자들보다 적어도 한 가지는 더 알고 있었던 셈이고, 바로 이것이 ‘무지(無知)의 지(知)’인 것이다. 많이 안다고 자랑하는 사람에게 진리가 나타날 수 없다. 모든 진리는 무지를 자각하는 사람에게만 파악된다. 즉 진리는 겸손한 자에게만 스스로를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무지를 자각한 사람만이 지혜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고, 그런 애지자만이 영혼을 잘 가꿔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과 행동은 일치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식은 다만 지식을 위한(죽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아는 만큼 반드시 행하는(살아 있는) 지식이었다. 선을 알고 나서도 그 선을 힘써 행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는 모르고 악을 행하는 자보다 알고도 악을 행하는 자가 더 많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일에 대해서도 소크라테스는 사람이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생각이 욕망이나 무지에 의해 흐려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자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식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다. 가령 “잘 아는 목수가 좋은 목수다”라는 말처럼 앎과 좋음이 일치하는 것이다. 좋은 목수, 즉 기술이 좋은 목수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많이 알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그 선에 대해 우선 많이 알아야 한다.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죄목으로 고소를 당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년들을 부패하게 했다. 둘째, 국가가 지정한 신 대신에 이상한 신을 믿는다. 물론 이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자기가 옳지 않은 일을 할 때는 그것을 반대해온 내면적인 양심의 소리를 듣곤 했는데, 이것을 두고 아테네 시민들은 그가 새로운 신을 믿는다고 매도했던 것이다. 재판 당시의 배심원은 500명이었는데 신에 대한 불경죄의 경우 일단 유죄냐 무죄냐만 판결을 내렸다. 결과는 280대 220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유죄였다. 다음에 형량을 놓고 다시 판결을 내리는데 원고 측이 요구한 형량은 사형이었고 소크라테스 측에서 요구한 형량은 벌금형으로, 그것도 처음에는 단 1므나를 제시했다. 결국 플라톤 등이 그를 설득하여 30 므나로 정해지긴 했지만,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믿었던 소크라테스는 벌금 1므나를 내는 것도 억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내 재판이 열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재판정에서 누구에게 사과하거나 애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민들과 배심원들을 꾸짖으며 정의와 진리의 길을 설파했다. ”당신들은 자신들의 지갑을 가능한 한 많이 채우고, 명성과 존경을 받으려고만 노심초사하고 있구려. 더구나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도덕적인 판단과 진리, 그리고 당신들의 영혼을 개선하는 데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으며, 또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그의 제청과 마지막 변론은 결국 그에게 무죄를 판결한 배심원들의 비위까지 거슬려 360대 140이라고 하는 큰 표 차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 죽음이란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즉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지혜를 추구하는 참된 철학자라면 육체로부터 마땅히 해방되려 할 것이다.
독이 든 잔을 간수에게서 받아들고, 그는 태연하게 기도를 올린다. 그런 다음 조용히 마셔 버린다. 하반신이 거의 다 식었을 때, 소크라테스는 얼굴에 가렸던 천을 제치면서 “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마리를 빚졌네. 기억해 두었다가 꼭 갚아 주게!”라고 부탁했다. 여기에서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약(醫藥)의 신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어떤 사람이 병이 들었다가 나을 경우, 감사의 뜻으로 닭 한 마리를 신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은 “인생의 모든 병에서 벗어났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인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것은 살아생전의 독보적인 인품과 더불어 죽음의 순간에 보여준 위대하고 장엄한 모습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소피스트들이 상대적으로 회의적인 태도에 머물렀던 데 반해,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와 객관적인 도덕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세계 4대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또 우리에게 기꺼이 철인(哲人)으로 부르도록 만든 것은 진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삶에 대한 그의 진지한 자세 때문이 아닐까 한다.
소(小)소크라테스학파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그의 정신을 온전히 계승하여 발전시킨 사람은 물론 플라톤이다. 그러나 그 사상의 어느 한쪽만을 발전시킨 제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틀어 우리는 소(小)소크라테스학파라고 부른다. 키니코스학파는 덕을, 키레네학파는 행복을, 메가라학파는 지식을 강조했다.
키니코스학파 (덕)
키니코스학파는 안티스테네스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는 인간에게 덕이 가장 중요하며 덕이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행복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 덕이란 모든 욕심을 버리는 무욕(無慾)한 생활로만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사상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 바로 그의 제자인 디오게네스다. 디오게네스가 삶의 목표로 삼은 것은 무욕과 자족, 그리고 무치(無恥)다. 아무런 욕심 없이 현재의 처지에 스스로 만족하며, 아무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생활이 그가 꿈꾸는 삶이었다. 그리고 항상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동물로 개를 꼽았다. 개는 아무것도 갖지 않고, 남의 눈치를 보는 일도 없으며, 주는 대로 먹고 아무데서나 잠을 잔다. 이러한 생활이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이었다.
특히 그는 무치와 관련해서, 우리가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본능적 욕망을 간단하고 편리하게 채우면 된다고 주장했다. 가령 배고플 때 먹는 행위를 탓할 수 없듯이, 남녀가 사랑하는 일 또한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타고난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은 떳떳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괜스레 부끄러워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자연에 거슬러 인간의 본능을 짓누르려는 우리의 잘못된 풍습이나 문명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반(反) 자연적인 것에 맞서서 그것들을 없애려 노력해야 한다. 디오게네스에 의하면, 원래 자연은 인간이 아무것도 갖지 않아도 살아가도록 창조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문화를 지나치게 즐기는 것에서 벗어나 원시 상태의 단순함과 순수함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디오게네스의 행동을 우리가 현실의 삶에서 그대로 흉내를 낸다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스스로 만들어낸 물질문명에 압도당하고 자기들이 창조해낸 문화에 오히려 얽매여 가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 문명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과 자연으로 북귀하자는 정신만은 여전히 생명력을 지닌다. 특히, 자원고갈과 환경오염 그리고 인간성의 상실 등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의 사상은 “과연 문명의 발달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었는가”라고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 주고 있다.
키레네학파 (행복)
키레네학파는 키레네에서 태어난 아리스티포스가 그 창시자이며, 쾌락주의를 주장한다. 아리스티포스는 “덕이 행복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로부터 “쾌락주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이라는 주장을 이끌어냈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정신적인 쾌락뿐만 아니라 물질적·육체적 쾌락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이 학파의 학자들은 점차 그 쾌락을 얻기가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고, 특히 극단적인 육체적 쾌락은 반드시 고통과 후유증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초기의 쾌락주의는 후기에 들어와 염세주의(厭世主義)로 바뀌었다. 바치 처음에는 적은 양으로도 만족하다가 차츰차츰 그 양을 늘려가야 똑같은 쾌락을 느끼게 되는 마약중독자처럼, 쾌락이란 항상 더 강하고 큰 자극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의 클라이맥스를 경험한 사람에게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끝내는 자살과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가난한 나라보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발달되어 있는 북유럽의 선진국에서 자살률이 높고, 쾌락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부유층에서 오히려 자살이 많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메가라학파 (지식)
마지막으로, 메가라학파는 메가라 지방 출신인 에우클레이데스에 의해 창시되었따. 그는 “덕은 지(知)다”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으로부터 지식을 중요하게 보고 또 그것을 선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주지주의를 고집했다.
참고자료 및 원본 : 네이버 지식백과, 강성률
-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 : https://terms.naver.com/list.naver?cid=41908&categoryId=58133&so=st4.a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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