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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ahNyJgDZmkc&t=288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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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스미스, 마르크스, 케인스, 하이에크 이해하기
아담 스미스 이해하기
1775년 세워진 이 스코틀랜드 대학에 철학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조용한 편이었고, 그는 어머니와 평생 살아갔죠. 그는 사람들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의 책에서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인데 어떻게 '도덕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지 질문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마음 속에 공명정대한 관찰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유명인이 되었고, 특별한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찰스 공작이 그의 양아들과 동행하며 가정교사를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당시 귀족 가문에서 유행하던 자녀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스미스는 수락하죠.
그는 여행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은 스미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8세기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봉건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또한,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늘어난 생산을 팔기 위해 더 넓은 시장이 필요해졌고, 자유무역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부' 라는 것은 '금'과 '은'의 축적으로 보는 '중상주의'가 지배적이었는데, 아담 스미스는 이 '중상주의'를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당시 한 나라의 부의 기준은 금고에 얼마나 많은 '금'과 '은'을 가지고 있는지 였습니다.
그는 '케네'를 만나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의사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케네는 사회 경제 체제를 신체로 바라보았는데요.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밥을 먹어야 하듯, 사회도 그러하다'
사람이 노동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얻고, 그것을 사회에 유통하므로써 사회는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사회는 3개의 계층으로 구성되어, 가치가 돌고 돈다는 겁니다. 마치 혈액처럼 말이죠.
또한, 그는 '땅' 만이 부의 원천이라는 '중농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이런 케네의 생각은 '스미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국부 즉, '국가의 부'는 돈과 은의 축적이 아니라는 것이죠. 스미스는 '부'라는 것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국부'를 증진시키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3년간의 긴 여행 끝에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이야기를 이어서 살펴보죠. 여행에서 돌아온 스미스는 여행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국부론'에 대해서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가 근무했던 대학인 '글리스코'는 엄청난 부의 축적을 이루는 시기였습니다. '담배 수출입'의 중심지였거든요. 항구가 있는 글래스고는 경기가 좋아졌고, 경제적 부가 생겨났죠. 그는 이 시장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데이빗 흄이라는 사람과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였죠. 그는 많은 사람들과 사귀진 않았지만,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과 지속적인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매주 저녁을 함께 하며 많은 저녁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1776년 3월, 국부론이 탄생하게 됩니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국가의 부를 증진시킬 수 있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디서든 노동이 이루어지면 '부'가 생산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국가의 부라는 것을 '모든 국민이 연간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켄은 '중농주의'를 말하면서 모든 '부'라는 것은 '농업'에서 온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스미스는 '노동'에서 '부'가 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국부론을 통해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사상에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모든 '부'가 노동에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상품의 가치'는 생산하는데 들어간 노동량이 좌우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유명한 말은 무슨 말일까요?
스미스는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이유가 빵집 사장의 양심 때문이 아니라, '이기심'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가격'을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서 시장경제가 활발하게 한다고 말했죠.
즉, 자유로운 시장만이 개인과 국가를 부자로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국부론에 딱 한 번 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통해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완전한 자유 시장', 이상적인 세상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당대 최고의 사상가라는 칭호를 얻었는데, 그 뿐만이 아닙니다. 국부론의 첫 장에는 현대에도 그대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개념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근대경제의 기본원리'를 설명했으며, 그것 때문에 국부론은 인류 전체에게 엄청난 가치를 갖는 책이 되었습니다. 그는 분업과 국민총생산, 무역과 개방의 중요성, 보호무역의 문제점들 등, 지난 수십 년간 경제학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아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철지난 책이 아닙니다. 우리 근대 경제의 틀을 만든 책이죠. 지금도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기본원리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죠. 그런데, '정부'의 개입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덤 스미스를 끌고 오면서 많은 오해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자역무역을 신봉하고, 거대정부를 반대하고, 자유 시장 경제를 지지했다고만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담 스미스는 '돈 많은 부자들의 편'이라는 오해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유로운 개인의 이익추구... 바로 이 구절이 가장 많은 오해를 만든 부분입니다. 하지만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경제적 이기심은 사회의 도덕적 한계 내에서만 허용'된다고 명확히 말했습니다. 즉 그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의 이전 저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인간은 결국 도덕적인 존재이고, 경제도 그 도덕 체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아담 스미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2가지 책을 모두 읽어보아야 합니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을 말이죠. 이 두권을 읽고 나면, 그의 '빈민'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아담 스미스는 대중을 돕는 최선의 길이 자유 시장 경제라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있다고, 그래서 이기적인 행동도 결국 공공의 행동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행동 했던 것이죠.
그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 왔을 때, 그는 작성 중이던 원고들을 모두 태우도록 지시했습니다. 우리는 아담 스미스를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는 '자본주의'라는 표현을 단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그 대신인간의 도덕적 범위 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체제 추구를 부르짖었으며, 이상적인 세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만얀 현대의 불평등과 위기 상황을 바라보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미국과 영국 등의 나라들에 엄청난 실망을 할 것 같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에 비해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죠. 아담 스미스의 유명한 문구가 있습니다. '국민이 대부분이 가난하고 비참하게 사는데 그 나라가 부유하다고 말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죠.
국부론의 원제목은 'Wealth of Nations' 입니다. 즉, 특정 국가나 단체의 부가 아니라, 모두의 부의 상승에 대한 책이었죠. 그러므로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1%의 탐욕과 부패로 나머지 99%가 고통 받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이었습니다.
칼 마르크스 _ 아담 스미스, 그 후 자본주의로의 변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19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자본주의'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본가에 의해 희생된 '노동자'들의 수는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인간을 사랑했던 또 다른 아담 스미스,, '칼 마르크스'가 탄생하게 됩니다. 보통 '마르크스'를 생각하게 되면, 그의 공산주의와 투쟁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그는 최초로 왜 가난한 사람은 항상 가난할까? 자본주의는 항상 안정적인 체계일까? 이런 의문들을 최초로 던진 철학작였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후, 어떻게 자본주의가 노동계층을 파괴하는지 밝혀내고 싶었습니다.
청년시절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 인간, 사회, 자연 이 모든 것들이 고정 불변의 것들이 아니라 정 반 합의 법칙으로 끊임 없이 변화한다는 철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의 변화를 만드는 주체가 세계 밖에 존재하는 '절대정신'이라는 주장에 마르크스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포이에르바하가 주장한 '물질'이 세계를 구성하고 이끌어간다는 '유물론'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변증법'과 '유물론'을 둘다 받아들인 본인만의 '세계를 바라보는 법'에 대해서
'유물론적 변증법'이라는 자신만의 철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자신의 의문을 풀어나갔을까요?
1843년 마르크스는 '급진적 반정부 신문'인 '라인신문'의 편집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사들은 검열되기 일수였습니다. 기자가 된 이후, 그는 충격을 받고,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유의 도시 '파리'로 이동합니다.
거기서 그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2가지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공산주의'입니다. 다른 하나는 '엥겔스'라는 독일의 경제학자 였습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정말 훌륭한 사상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엥겔스는 사회주의의 후원자, 공산주의의 후원자였습니다. 그는 마르크스가 계속 글을 쓰기를 원했고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을 마칠 때까지 계속 돈을 보내주었습니다.
1800년대에는 '아동노동자'들이 정말 셀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엥겔스는 이러한 상황에 분노했고, 이러한 분노는 마르크스와 공명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많은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둘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은 평생의 동지가 되었죠.
또한,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비참한 '노동자'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그는 '노동자들을 위한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점차 혁명주의적인 공산자로 바뀌게 됩니다. 그는 엥겔스와 함께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1848년 두 사람은 공산주의자 강령을 선언하게 됩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 유명한 '공산당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고 그 개선방향을 찾고,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변화 가능한 것들을 연구했었습니다.
1848년 유럽은 혁명의 피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마르크스는 보르셀, 파뤼 등에 가서 혁명에 참여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마르크스는 '붉은 박사'라는 악명과, '인류의 해방'을 위한 새로운 사상을 가져온 사람이라는 두 가지를 동시에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에게 잇따라 추방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혁명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영국으로 떠나게 되는데요. 그는 거기서 많은 어려움을 마주하게 됩니다. 엥겔스로부터의 도움도 기대하기 어려워졌고, 신문사도 다 힘을 잃었기 때문에 가족을 제대로 부양할 수 없었거든요. 게다가 그의 아들이 폐렴으로 세상을 뜨게 됩니다. 그는 가난으로 인해, 그의 6아이 중 3 아이들을 잃었습니다.
이후 다시 엥겔스의 도움을 받게 되어, 그는 자본론의 집필을 이어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본론을 쓴 이유는 '자본주의'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비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수백번을 읽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책이 바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었습니다.
1867년 15년 간 집필한 '자본론 제 1권'이 출판되었습니다. '자본의 생산 과정'이었습니다. '자본론'은 마르크스가 그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정제연구에 최로로 적용해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입니다.
'자본론'에서 제일 먼저 다룬 주제는 '상품'입니다. 상품은 인간이 만든 제품입니다.
상품은 쓸모가 있는지 살피는 '사용가치', 교환할 수 있는지 살피는 '교환가치',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상품'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품'은 '노동'을 통해 생산해 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상품의 가치는 상품 생산에 들어간 평균 노동시간이라고 정의했죠.
또한 그는 '화폐'를 상품의 가치를 표시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화폐이 물신성'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아담 스미스처럼 '노동'이 최고의 가치임을 받아들였고, 다시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분업'은 인간을 그저 부품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본론'을 쓴 이유는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은 왜 가난할까?' 반대로 '놀고 먹는 자본가들은 왜 점점 더 부자가 될까'하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그 해답을 '이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냄으로써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본론 1권은 어떻게 자본이 이윤을 남기는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시간이나 노동일수를 늘이는 '절대적 잉여가치'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빵 공장을 우리는 예시로 살펴보겠습니다.
밀가루 1kg 이 1 노동시간이라고 해보죠.
빵을 만드는 기계는 만개를 만들면 망가지죠. 기계와 노동력 모두 1노동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빵 한개를 만들기 위해서는 밀가루 1노동시간, 기계 1노동시간, 인간의 1노동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을 노동시간을 나타내는 수단인 '화폐'로 표현하면 위와 같다는 것이죠.
노동자가 하루 8시간을 일하면 빵 8개를 만들 수 있으므로, 모두 24노동시간의 가치가 생산되는 것이죠.
노동자가 하루 종일 일하면 빵 8개가 생산되고, 그에 해당하는 가치가 생산되는 것이죠. 그런데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밀가루와 기계는 가치를 그대로 부여받는데, '노동자'는 그 가치를 3천원 밖에 자본가로부터 부여받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럼 나머지 5노동시간의 가치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바로, '자본가'의 주머니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죠.
마르크스는 이렇게 '남은 가치'를 '잉여 가치'라고 명명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인데, 왜 '노동자'는 이런 상황에 적극적으로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자본가'가 '그만 둬'라고 말하면, '노동자'는 그만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이런 상황임을 알기 때문에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더 많이' '일'하라고 말합니다.
물론, 기본급은 정해져있는 상태에서 말이죠.
즉, 자본가는 더 많이 '노동자'를 착취할 수록 더 많은 '부'를 얻게 됩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시간 연장'으로 생기는 잉여가치를 '절대적 잉여가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본가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이윤을 얻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죠.
자본가는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 생각해 낸 것이, '노동생산력'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빵을 만드는 것보다 기계로 빵을 만드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빵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죠.
이는 결국 '필요 노동 시간'은 줄어들고, '잉여 노동 시간'은 늘어난다는 것이죠. '노동자'의 임금은 날로 싸지고, '자본가'는 그만큼 더 많은 이윤을 남기게 된다는 것이죠. 마르크스는 이렇게 생긴 이윤을
상대적 잉여가치라고 말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최초로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이해했습니다. 착취 현상이 일어날 거로 생각했습니다. 마르크스는 더 많은 이익을 얻기위해 더 많은 기계를 고용하는 상황 속에서, 더 많은 실업이 생겨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계로 인해, 더 많은 실직이 생기게 되면, 실업자의 증가로 '임금'은 추가로 하락하고, 이렇게 더 많은 상품은 시장에 쏟아져나오는데, 이것을 사갈 사람이 없어서 '기업'도 '자본가'도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했습니다.
결국 자봉주의의 위기인 '공황'이 시작되고,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혁명'을 시작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이야기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처럼 '자본주의' 붕괴 후 '사회주의' 사회의 등장을 예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처럼, 자본주의 조차 역사의 한 과정으로 보았고, 결국 공산주의로 가는 한 과정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이죠. 1883년 마르크스는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사후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자료들을 모아 '자본론 2권'을 출간하여 '자본'의 유통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1894년 '자본론 3권'을 통해서 자본주의 생산의 총 과정을 발간했습니다. 그리고 '자본론'은 '사회주의'의 성서로 불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상은 한 세기 이후, 레닌과 같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레닌, 마오쩌둥 등 그런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마르크스의 사상을 제대로 이하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억압'받는 노동자들을 도와서 혁명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혁명가였습니다.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세상을 해석한 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자본주의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경제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공산주의 국가의 탄생에 영향을 미친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세월이 더 흐르면서 다양한 평가가 나올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르크스가 철학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는 우리나라에서 마르크스는 입에 담기 부담스러운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죠. 마르크스가 '붕괴'할 것이라고 말한 자본주의 국가들은위기를 겪으며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아직도 잘 버티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들은 '독재'와 '빈곤'에 허덕이다 20세기말 도미너처럼 무너져내렸습니다. 경쟁에서 승리하자 '자본주의' 국가들은 '마르크스'와 그의 책들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본론이 세상에 나온지 140년도 더 지났습니다.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이라는 에상은 빗나가고 오히려 '공산주의'가 붕괴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본론'은 가치가 없는 걸까요?
사실 자본주의는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새롭게 변신하며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마르크스가 남긴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가 우리에게 절박한 메시지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자본론의 가치를 마르크스의 예측이 맞았는지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그는 가난한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과 그들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연민과 열정으로 '자본론'을 썼던 것이었죠.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그것이 바로 제일 먼저 주목해야할 자본론의 가치인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스미스의 공통점
결국, 스미스와 마르크스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출발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이 잘 살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두 사람이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수식이 난무하는 현대의 경제학과는 '사고'의 '시작'부터가 다르지 않습니까?
자본주의는 아담 스미스를 '오해'했습니다.
공산주의도 칼 마르크스를 '오해'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그렸던 세상은 '끝 없는 자본주의의 탐욕'과 '소수지배' '독재지배'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아담 스미스가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에도 공명정대한 관찰자가 있다고 믿었듯이, 위기의 순간 우리의 안에 공명정대한 관찰자가 세상을 구원해주길 기대해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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